전남

금성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규모로 보물, 7살이 쓴 현판이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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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나주시 금성관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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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무일

기본 정보

■ 전라도의 중심에서 나라를 논하다

― 나주 금성관(錦城館)

전라남도 나주 원도심 한복판, 조선시대의 관아와 고풍스러운 거리들이 남아 있는 나주 금계동에는 위풍당당한 건축물이 하나 서 있습니다. 바로 전라도 중심 행정의 상징, '금성관(錦城館)'입니다.

금성관은 조선시대 전라도 지방을 대표하는 객사(客舍)로,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접대하고, 왕의 위패를 모셔 예를 올리던 중요한 공식 접대 및 의례 공간이었습니다. 그 위상은 오늘날의 도청 청사와 영빈관이 결합된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전라도를 대표하는 가장 큰 객사

금성관은 1430년(세종 12년)에 처음 세워졌고,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전국에 남아 있는 객사 중 건물의 규모와 보존 상태가 가장 우수한 건물로 꼽히며, 국보급 건축문화재로 평가받습니다.

건물 전면에는 ‘금성관(錦城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금성’은 나주의 옛 이름입니다. 객사의 정면은 12칸, 측면은 5칸에 이르는 장대한 구조로, 건물 내부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왕의 위패)를 모시고 정기적으로 예를 올리던 ‘상징적 왕의 전각’이었습니다.


■ 나라의 운명을 논하던 곳

금성관은 단순한 지방 접대소가 아닌, 전라도의 군정과 행정, 정치적 논의의 중심지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관료들, 그리고 각 지역 수령들이 이곳에 모여 왕명을 받들고, 세금과 병력 동원, 수해 복구 같은 중대 사안을 논의했습니다.

그만큼 이곳은 백성들의 삶과 조선의 국운에 직결되는 명령과 결정이 내려지던 공간으로, 당시 나주의 정치·군사적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 금성관에 얽힌 전설과 일화

금성관에는 유명한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옵니다.
어느 날, 금성관의 왕전패 앞에 제를 올리던 관리가 제사 도중 실수로 향로를 넘어뜨려 불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때 갑자기 건물 지붕 위에서 하얀 학 두 마리가 날아들어 화염을 잠재웠다고 합니다. 이후 나주 사람들은 이 학을 ‘왕을 수호한 신조(神鳥)’라 여겼고, 금성관은 신령이 깃든 건물로 더욱 존중받게 됩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일본 관헌조차 금성관 내부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는 이곳이 왕의 상징이자 조선 민심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 금성관 현판

나주목 객사건물인 금성관의 현판은 그 글씨가 힘있고, 용이 용틀임을 하는듯 멋지다. 이 글씨는 낭옹공(浪翁公) 김현(金晛)이 1612년 나이 7세의 나이에 쓴 글씨이다. 나주 다시면 회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장성군 삼서면 소룡리로 이거하였다.
1624년 식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많은 유생들의 사표가 되었으며, 시문집 낭옹유고와 진사입격 3등 70인 교지(敎旨)가 전해진다.


■ 오늘날의 금성관

지금의 금성관은 보물 제203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라도를 대표하는 전통 건축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관람객들은 이곳에서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의례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으며, 인근에는 나주읍성, 나주목 관아, 향교, 남고문 등 풍부한 유산들이 밀집해 있어 역사탐방 코스로도 최적입니다.


■ 조선의 법과 예가 머물던 곳

금성관은 단지 오래된 한옥이 아닙니다.
조선 왕조의 권위와 지방 자치의 중추,
그리고 민심과 나라를 잇는 공간이었습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인물과 결정을 품어온 이곳은,
지금도 조용히 역사의 무게를 말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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